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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와 청산리 전투

바로 가기: 차이점, 유사점, Jaccard 유사성 계수, 참고 문헌.

일제 강점기와 청산리 전투의 차이

일제 강점기 vs. 청산리 전투

일제강점기(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는 한국의 역사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주요 시대 중 하나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가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 아래 놓였던 시기이.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 또는 청산리 대첩(靑山里 大捷)은 1920년 10월 김좌진, 나중소(羅仲昭), 서일, 이범석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완루구(完樓溝) 등지의 10여 차례에 간도에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전투를 벌인 총칭이.

일제 강점기와 청산리 전투의 유사점

일제 강점기와 청산리 전투는 공통적으로 47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니온백과에서): 러시아, 독립군, 간도, 경찰, 봉오동 전투, 기독교, 김규식, 김좌진,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광복단, 대한제국, 두만강, 니콜라옙스크 사건, 자유시 참변, 장쭤린, 이광수, 일본,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육군, 일본군, 일본인, 정의부, 조선, 조선인, 조선총독부, 중국, 중화민국, 지청천, 참의부, 청일 전쟁, ..., 영사관, 프리모르스키 지방, 통화 사건, 함경북도, 신민부, 10월, 10월 25일, 10월 2일, 1919년, 1920년, 1921년, 2월, 3·1 운동, 7월 16일, 8월, 8월 17일, 9월. 색인을 확장하십시오 (17 더) »

러시아

시아 연방() 또는 러시아()는 동유럽과 북아시아에 걸쳐 있는 연방제 국가로,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국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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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독립군(獨立軍)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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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間島)는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북쪽의 조선인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로, 간도의 범위에 관하여는 여러 이견이 있. 일반적으로 간도라 하면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지역을 가리키며, 두만강 북쪽인 연변 지역을 '북간도'(또는 '동간도'), 그 서쪽인 압록강 북쪽 지역을 '서간도'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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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독일 함부르크의 경찰관 일본의 경찰관 경찰(警察)은 사회의 일반적인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부의 행정 활동, 또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 조직된 국가 기관을 말.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찰은 공무원에 속. 따라서 경찰은 국가 행정기관을 뜻하는 말로도 흔하게 쓰이며, 이를 위한 행정 활동은 공권력이라고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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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는 1920년 6월 6일~6월 7일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일명 최명록(崔明錄)), 안무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중국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이다. 병력은 교전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한국인 독립군은 천 2백여 명이었고, 일본군은 5백여 명 정도였다. 삼둔자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일본군 제19사단은 병력을 출병하여 간도 내의 독립군단 토벌에 나선다. 1920년 6월 7일 북로 제1군 사령부(간도국민대) 부장 홍범도는 군무 도독부군,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고 봉오동 골짜기 인근에 포위진을 짜고 제3소대 분대장 이화일을 시켜 일본군을 유인해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소나기가 내리쳤고, 일본군 부대는 선봉으로 올라가던 일본군 부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가하면서 교전했다. 고지 꼭대기까지 올라간 홍범도 부대는 이를 내려다보고 남은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했다. 6월 7일 오후 1시쯤, 일본군이 봉오동 상동(上洞) 남쪽 300m 지점 갈림길까지 들어오자 홍범도는 신호탄을 올렸다. 중앙선데이 제257호 257호 2012.02.12 삼면 고지에 매복한 독립군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된 봉오동 전투는 3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사상자가 늘자 월강추격대대는 도주하기 시작했는데, 강상모(姜尙模)가 2중대를 이끌고 쫓아가 다시 큰 타격을 입혔다. 임시정부 군무부는 봉오동 승첩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한 반면 아군은 불과 4명만 전사했다고 발표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 피해는 전사자 157, 중상 200, 경상 100명이며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자 4, 중상 2명에 불과했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북로독군부군은 청산리로 옮겨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하여 청산리 대첩을 전개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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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독교(基督敎)From Ancient Greek Khristós (Latinized as Christus), translating Hebrew מָשִׁיחַ, Māšîăḥ, meaning "the anointed one", with the Latin suffixes -ian and -it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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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식(金奎植, 1881년 2월 28일 ~ 1950년 12월 10일)은 대한제국의 종교가,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 학자, 시인, 사회운동가, 교육자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 경신학교의 교수와 학감 등을 지내고 미국에 유학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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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좌진(金佐鎭, 1889년 12월 16일 ~ 1930년 1월 24일)은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자 독립운동가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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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 정부

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1919년 ~ 1948년)는 1919년 3월 1일 경성(京城)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9년 4월 11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의 망명정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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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단

광복단(大韓光復團)은 1913년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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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국()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통치하였던 전제군주제 국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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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만강의 위치 두만강 图们江 두만강(豆滿江)은 백두산의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되는 강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화인민공화국 국경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러시아 국경 (ru:Российско-северокорейская граница)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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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옙스크 사건

옙스크 사건 으로 불타서 내려앉은 니콜라옙스크 일본영사관 1920년 6월 욱일기를 내거는 니콜라옙스크 주둔 일본 제국 해군 육전대 니콜라옙스크 사건은 1920년 2월과 3월 사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붉은 군대가 하바롭스크 지방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에 출병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총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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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은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스보보드니(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에서 소련군이 대한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사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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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린

장쭤린(1873년 3월 19일 ~ 1928년 6월 4일)은 중화민국 국민정부 만저우 지방 베이양 군벌 계파 시대의 봉계군벌이자 정치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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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언론인, 시인, 문학평론가, 작가, 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서 대한의 재생과 광복을 꿈꾸고 기획하였으며,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종학원에서 철학, 윤리, 심리, 종교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잡지《개벽》에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출판법위반으로 입건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22년 5월 개벽지(誌)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우리민족이 쇠퇴한 것은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로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때는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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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일본국(닛폰코쿠), 약칭 일본(日本,, 닛폰)은 동아시아에 있는 국. 국토는 태평양에 있는 일본 열도의 네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를 중심으로 주변에 산재한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 총 면적은 37만 7835 km2인데 이는 노르웨이(스발바르 제도와 얀마옌을 포함한 경우)보다 작으며 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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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일본 제국(日本 帝國)은 1868년 1월 3일부터 1947년 5월 3일 사이의 일본의 입헌 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특수한 정치 체제(국가 체제), 혹은 일본 제국주의 시기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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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육군

일본 제국 육군 혹은 대 일본 제국 육군()은 1871년 일본 제국의 육군으로 창설되었으며 1945년 일본국 헌법 9조항에 의하여 무력 이용을 포기함으로써 없어지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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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일본군(日本軍,)은 일본 제국의 군대를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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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일본인(にっぽんじん; 닛폰진으로도 읽힘)은 일본 열도에 사는 야마토 민족, 류큐 민족, 아이누 민족, 윌타 민족, 니브히 민족, 오로치 민족 등을 총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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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부

정의부(正義府)는 1924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항일 무장독립운동 단체, 군정부(軍政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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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선(朝鮮,, 1392년~1897년(혹은 1910년))은 이성계가 세운 나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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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조선인(朝鮮人)은 한국인을 뜻하는 다른 말로서, 다음 뜻으로도 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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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의 휘장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거버먼트 제네럴 오브 코리아)는 일본 제국이 1910년 10월 1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한반도에 대한 통치를 위해 운영하던 직속기관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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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국()은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서부 연안의 도서 지방을 포괄하는 지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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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중화민국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공화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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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청천(池靑天, 1888년 2월 15일 ~ 1957년 1월 15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항일 독립운동가 겸 군인이었으며,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지휘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광복군사령관·광복군 총사령관 등을 역임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정치가 겸 정당인으로 활동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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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부

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는 일제강점기 1924년 6월부터 1929년 10월까지 활동한 무장독립운동단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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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청일 전쟁(淸日戰爭)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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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관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 영사관(領事館) 또는 총영사관(總領事館)은 영사가 주재국에서 직무를 보는 기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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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르스키 지방

리모르스키 지방 프리모르스키 지방()은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러시아의 지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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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사건

중화민국지린 성퉁화 시 통화 사건은 1946년 2월 3일 인민해방군, 독립군이 지린 성 퉁화 시에서 일본군 패잔병과 전투를 벌인 총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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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경북도(咸鏡北道)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동부에 있는 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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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부

신민부(新民府)는 한국의 항일 독립운동단체, 군정부(軍政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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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월(十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열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 평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1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하고 같은 요일로 끝나고 2월하고도 항상 같은 요일로 끝. 그 다음 해가 윤년일 경우에는 그 다음해 9월과 12월과 같은 요일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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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10월 25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98번째(윤년일 경우 299번째) 날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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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10월 2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75번째(윤년일 경우 276번째) 날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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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919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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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920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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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921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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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월(二月, February)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두 번째 달이며, 평년일 때에는 28일, 윤년일 때에는 29일까지 있. 이 달과 그 해의 10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나며, 이 달과 작년의 6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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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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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

7월 16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97번째(윤년일 경우 198번째) 날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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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월(八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여덟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 이 달부터 연말까지는 2의 배수가 오는 달마다 31일까지 있. 이 달과 그 해의 11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 또한, 윤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2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되며, 다음 해도 평년인 경우 다음 해 5월과 같은 요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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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

8월 17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9번째(윤년일 경우 230번째) 날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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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월(九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아홉 번째 달이며, 30일까지 있. 한국, 중국, 일본, 미국과 같은 북반구에는 가을이 되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과 같은 남반구에는 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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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목록은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일제 강점기와 청산리 전투의 비교.

일제 강점기에는 437 개의 관계가 있고 청산리 전투에는 138 개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공통점 47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Jaccard 지수는 8.17%입니다 = 47 / (437 + 138).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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