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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

색인 봉선사

봉선사(奉先寺)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이.

25 처지: 경기도, 고려 광종, 병자호란, 광릉, 봉선사, 대한불교조계종, 대웅전, 교종, 남양주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 남양주 봉선사 칠성도, 남양주시, 운악산, 임진왜란, 이광수, 일제 강점기, 정희왕후, 조선 예종, 조선 세조, 진접읍, 탄문, 한국 전쟁, 1469년, 1551년, 1637년, 969년.

경기도

경기도(京畿道)는 대한민국의 북서부에 있는 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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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광종

광종(光宗, 925년~975년 7월 4일 (음력 5월 23일)은 고려 제4대 황제(재위: 949년~975년)이다.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묘호는 광종, 시호는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황제(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皇帝)이다. 태조의 넷째 아들, 신명순성왕후의 셋째 아들로서 요절한 왕태, 정종의 동생이다. 비는 대목왕후 황보씨(皇甫氏)로 태조와 신정왕후의 딸로 이복누이이며, 후궁인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는 배다른 형 혜종의 딸이다. 949년 3월 동복 형 정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949년 광덕(光德), 960년 준풍(峻豊)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중국 후주로부터 과거제도를 받아들여 처음 과거를 실시하였다. 노비안검법으로 부당하게 노비가 된 양민들을 석방하였고, 민생안정과 백성구휼에 힘을 썼다. 그러나 960년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Daum 지식 http://durl.kr/5fyrth 이 대상(大相) 준홍(俊弘) 등의 역모를 고변한 이후 이를 빌미로 호족들을 대량으로 숙청하였고, 이복형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 동복형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 태조의 서자인 이복동생 효은태자 등을 처형하였고 자신의 장남인 태자 주(胄) 역시 의심하였다. 과거 시험으로 선발된 관료들과 후주에서 귀화한 관료들을 통해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관복 제도를 새로 제정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불교 장려에도 관심을 갖고 사찰의 중건과 중수를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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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부터 1637년 2월 24일(음력 1월 30일)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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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광릉(光陵)은 조선 제7대왕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의 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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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

봉선사(奉先寺)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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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은 대한민국 불교 최대 종단(종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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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청평사 대웅전 현판 대웅전(大雄殿) 또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불교 사찰에 설치되는 전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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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종

종(敎宗)이란 부처의 교설 및 그것을 문자로 나타낸 경전을 바탕으로 하는 종지(宗旨)를 뜻하며, 불어종(佛語宗)이라고도 하고, 부처의 일심(一心)을 전하는 불심종(佛心宗)으로서의 선종(禪宗)의 입장에서 불교를 판별(判別)하여 교선2종(敎禪二宗)으로 나눈 데에서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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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

양주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南楊州 奉先寺 毘盧遮那三身掛佛圖)는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에 있는 불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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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봉선사 칠성도

양주 봉선사 칠성도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칠성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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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시

양주시청 1청사(구 미금시청) 남양주시(南楊州市)는 대한민국 경기도의 중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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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악산

운악산(雲岳山)은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과 가평군 조종면의 경계에 있는 높이 936m의 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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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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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언론인, 시인, 문학평론가, 작가, 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서 대한의 재생과 광복을 꿈꾸고 기획하였으며,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종학원에서 철학, 윤리, 심리, 종교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잡지《개벽》에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출판법위반으로 입건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22년 5월 개벽지(誌)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우리민족이 쇠퇴한 것은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로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때는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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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일제강점기(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는 한국의 역사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주요 시대 중 하나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가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 아래 놓였던 시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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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왕후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년 12월 8일 (음력 11월 11일) ~ 1483년 5월 6일 (음력 3월 30일))는 조선 세조의 왕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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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종

예종(睿宗, 1450년 1월 14일(음력 1월 1일) ~ 1469년 12월 31일(음력 11월 28일), 재위 1468년~1469년)은 조선의 제8대 임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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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

세조(世祖, 1417년 11월 2일 (음력 9월 24일) ~ 1468년 9월 23일 (음력 9월 8일), 재위 1455년~1468년)는 조선의 제7대 임금, 시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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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접읍

접읍(榛接邑)은 경기도 남양주시 북부에 위치한 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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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문

문(坦文, 900년~975년)은 고려의 승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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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국 전쟁(韓國戰爭)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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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년

설명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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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1년

설명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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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1637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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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9년

설명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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