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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양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바로 가기: 차이점, 유사점, Jaccard 유사성 계수, 참고 문헌.

박중양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차이

박중양 vs.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박중양(朴重陽, 일본식 이름: 朴忠重陽 호추 시게요, 1872년 5월 3일 ~ 1959년 4월 23일)은 일본과 대한제국의 관료, 외교관이며, 일제시대의 관료, 사상가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약칭 반민특위(反民特委)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제국과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악질적으로 반민족적 행위를 한 자를 조사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서 설치한 특별위원회이.

박중양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유사점

박중양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공통적으로 14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니온백과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 박흥식 (1903년), 강준만, 강원도, 대통령,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이광수, 이승만, 일본 제국, 일제 강점기, 황해도, 10월 23일, 1948년,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

반민특위 활동 보도 기사 (1949년 1월 11일자 조선일보 보도) 반민족행위처벌법(反民族行爲處罰法)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하며 반민족적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끼친 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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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 (1903년)

박흥식(朴興植, 1903년 9월 26일 ~ 1994년 5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기업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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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강준만(康俊晩, 1956년 1월 5일 ~)은 대한민국의 정치평론가·사회과학자·언론인이자 대학교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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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조선 후기 강원도 강원도(江原道)는 관동 지방(關東地方)에 해당하는 지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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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통령(大統領, president)은 공화제 국가의 국가원수로서 나라에 따라 임기가 다르고, 선출하는 방식도 국민의 직접 투표 혹은 의회에서 선출하는 방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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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반민규명위 보고서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大韓民國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약칭 반민규명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2004년 3월 22일 공포되면서 이 법률의 시행령에 따라 2005년 5월 31일 대통령 소속으로 발족한 기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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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언론인, 시인, 문학평론가, 작가, 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서 대한의 재생과 광복을 꿈꾸고 기획하였으며,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종학원에서 철학, 윤리, 심리, 종교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잡지《개벽》에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출판법위반으로 입건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22년 5월 개벽지(誌)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우리민족이 쇠퇴한 것은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로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때는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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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이승만(李承晩, 1875년 5월 1일(음력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또는 리승만은 조선과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의 개화파, 언론인, 정치인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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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일본 제국(日本 帝國)은 1868년 1월 3일부터 1947년 5월 3일 사이의 일본의 입헌 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특수한 정치 체제(국가 체제), 혹은 일본 제국주의 시기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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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일제강점기(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는 한국의 역사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었을 때 주요 시대 중 하나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가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 아래 놓였던 시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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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조선후기 황해도 황해도(黃海道)는 1417년부터 1954년까지 존속한 한반도의 중서부에 있는 도(道)로, 1954년 이후로는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로 분리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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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

10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96번째(윤년일 경우 297번째) 날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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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948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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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949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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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목록은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박중양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비교.

박중양에는 768 개의 관계가 있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는 83 개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공통점 14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Jaccard 지수는 1.65%입니다 = 14 / (768 + 83).

참고 문헌

이 기사에서는 박중양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정보가 추출 된 각 기사에 액세스하려면 다음 사이트를 방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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