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양와 창씨개명의 유사점
박중양와 창씨개명는 공통적으로 47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니온백과에서): 미 군정, 미나미 지로, 민족말살정책, 박춘금, 가족, 경성부, 경성일보, 김성수 (1891년), 장덕수, 장면, 이광수, 일본, 일본 제국, 일본 천황, 일본국 정부, 제2차 세계 대전, 정미칠적, 조선총독부, 중일 전쟁, 창씨개명, 친일반민족행위자, 윤덕영, 윤치영, 윤치호, 태평양 전쟁, 서울특별시, 송진우 (1890년), 한국인, 한일 병합 조약, 황국신민서사, ..., 10월 23일, 11월 1일, 1909년, 1910년, 1911년, 1923년, 1939년, 1940년, 1945년, 1946년, 1991년, 2월, 2월 11일, 5월, 7월 1일, 8월, 8월 10일. 색인을 확장하십시오 (17 더) »
미 군정
미 군정(美軍政, 米軍政)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
미 군정와 박중양 · 미 군정와 창씨개명 ·
미나미 지로
미나미 지로(Minami Jirou, 1874년 8월 10일 ~ 1955년 12월 5일)는 일본의 군인, 정치가이며 병과는 육군 기병이었.
민족말살정책
200px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 또는 내선일체()는 일본 제국이 조선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한민족의 저항을 철저히 분쇄·말살하여 최후까지 전쟁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취한 정책이.
박춘금
일본 중의원 의원 당선되었을때 당시 박춘금. (중앙에 있는 사람이 박춘금이다.) 박춘금(朴春琴, 1891년 4월 17일 ~ 1973년 3월 31일)은 일제 강점기의 직업적 친일 인물이자 정치 깡.
가족
새로 태어날 자식을 기다리는 가족. 가족(家族)은 대체로 혈연, 혼인, 입양, 친분 등으로 관계되어 같이 일상의 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공동체) 또는 그 구성원을 말. 집단을 말할 때는 가정이라고도 하며, 그 구성원을 말할 때는 가솔(家率) 또는 식솔(食率)이.
경성부
경성부(京城府) 또는 게이조 부()는 일제 강점기 때에 존재했던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해당.
경성일보
《경성일보》()는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 동안 발행된 신문이.
경성일보와 박중양 · 경성일보와 창씨개명 ·
김성수 (1891년)
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근대주의 운동가였으며,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행적 논란이 있. 대한민국 초기 정치인, 언론인, 교육인, 서예가였.
김성수 (1891년)와 박중양 · 김성수 (1891년)와 창씨개명 ·
장덕수
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한국의 친일파, 정치인, 교육자, 학자, 언론인이.
장면
장면(張勉 1899년 8월 28일 ~ 1966년 6월 4일)은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종교가·번역가·출판인·문인·저술가이자 대한민국의 종교가·외교관·교육자·정치인이.
이광수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언론인, 시인, 문학평론가, 작가, 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서 대한의 재생과 광복을 꿈꾸고 기획하였으며,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종학원에서 철학, 윤리, 심리, 종교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잡지《개벽》에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출판법위반으로 입건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22년 5월 개벽지(誌)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우리민족이 쇠퇴한 것은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로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때는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썼다.
일본
일본국(닛폰코쿠), 약칭 일본(日本,, 닛폰)은 동아시아에 있는 국. 국토는 태평양에 있는 일본 열도의 네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를 중심으로 주변에 산재한 작은 섬으로 구성되어 있. 총 면적은 37만 7835 km2인데 이는 노르웨이(스발바르 제도와 얀마옌을 포함한 경우)보다 작으며 독일보.
일본 제국
일본 제국(日本 帝國)은 1868년 1월 3일부터 1947년 5월 3일 사이의 일본의 입헌 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특수한 정치 체제(국가 체제), 혹은 일본 제국주의 시기를 의미.
일본 천황
국화문장은 공식 국장은 아니지만 일본 천황의 상징이며, 국장처럼 쓰이기도 한다 일본 천황() 또는 일왕(日王)은 일본의 군주로 일본 황실의 대표이.
일본국 정부
일본국 정부()는 일본국 헌법에 따라 설립된 일본의 중앙 정부이.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또는 World War II)은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치러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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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칠적
정미칠적(丁未七賊)은 대한제국에서 을사늑약 체결 2년 후인 1907년 7월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제3차 한일협약 또는 정미7조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일곱 친일파를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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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의 휘장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거버먼트 제네럴 오브 코리아)는 일본 제국이 1910년 10월 1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한반도에 대한 통치를 위해 운영하던 직속기관이었.
중일 전쟁
중일 전쟁(中日戰爭)은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사이의 전쟁이.
창씨개명
와 한글이 혼용되어 있다. 일본식 성명 강요() 또는 창씨개명()은 1940년 2월부터 1945년 8월 광복 직전까지 일본 제국이 조선인에게 일본식 성씨를 정하여 쓰도록 강요한 것을 말.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제령 제19호)하여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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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반민족행위자
일파 이완용 친일반민족행위자(親日反民族行爲者), 간단히 친일파(親日派)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일본 제국이 동아시아 각국을 침탈할 무렵에 일본 제국에 가담하여 그들의 침략과 약탈 정책을 지지하거나 옹호하여 추종한 무리를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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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영
윤덕영(尹德榮, 1873년 12월 27일 ~ 1940년 10월 18일)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관료로, 본관은 해평이.
윤치영
윤치영(尹致暎, 1898년 2월 10일 ~ 1996년 2월 9일)은 대한민국의 친일파겸 사상가, 정치인, 언론인이.
윤치호
윤치호(尹致昊, 일본식 이름:, 1865년 1월 23일 ~ 1945년 12월 9일)는 조선, 대한제국의 개혁, 민권운동가·문신이자 외교관·언론인·교육자, 한국의 정치가·교육자·사상가·언론인·종교가이며 기독교운동가였.
태평양 전쟁
평양 전쟁, 또는 때때로 아시아-태평양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역 중 하나로 태평양과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이.
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는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
송진우 (1890년)
송진우(宋鎭禹, 1890년 5월 8일 ~ 1945년 12월 30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며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에 언론인, 교육자, 사상가, 정치인으로 활동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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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국인(韓國人)은 대한민국 국적자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을 가진 사람을 말하며, 정식 국적이 아닌 조선적(朝鮮籍)재일 한국인 가운데 대한민국으로 국적을 변경하지 않은 사람을 말. 연합뉴스, 2014.12.29.
한일 병합 조약
일 병합 조약() 또는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은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일방적인 위력에 의해 이루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
박중양와 한일 병합 조약 · 창씨개명와 한일 병합 조약 ·
황국신민서사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는 일본 제국이 1937년에 만들어내 조선인들에게 외우게 한 맹세이.
10월 23일
10월 23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96번째(윤년일 경우 297번째) 날에 해당.
10월 23일와 박중양 · 10월 23일와 창씨개명 ·
11월 1일
11월 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305번째(윤년일 경우 306번째) 날에 해당.
1909년
1909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1910년
1910년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1911년
1911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1923년
1923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1939년
1939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1940년
1940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
1945년
1945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1946년
1946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1991년
1991년 9월 17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사진은 유엔 본사) 1991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2월
2월(二月, February)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두 번째 달이며, 평년일 때에는 28일, 윤년일 때에는 29일까지 있. 이 달과 그 해의 10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나며, 이 달과 작년의 6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
2월 11일
2월 1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42번째(윤년일 경우도 42번째) 날에 해당.
5월
5월(五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다섯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는 7개의 달중 하나이.
7월 1일
7월 1일은 그레고리력으로 182번째(윤년일 경우 183번째) 날에 해당.
8월
8월(八月)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여덟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 이 달부터 연말까지는 2의 배수가 오는 달마다 31일까지 있. 이 달과 그 해의 11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 또한, 윤년인 경우 이 달과 그 해의 2월은 같은 요일로 시작되며, 다음 해도 평년인 경우 다음 해 5월과 같은 요일이.
8월 10일
8월 10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2번째(윤년일 경우 223번째) 날에 해당.
위의 목록은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 박중양와 창씨개명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 박중양와 창씨개명의 유사점은 무엇입니까
박중양와 창씨개명의 비교.
박중양에는 768 개의 관계가 있고 창씨개명에는 125 개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공통점 47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Jaccard 지수는 5.26%입니다 = 47 / (768 + 125).
참고 문헌
이 기사에서는 박중양와 창씨개명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정보가 추출 된 각 기사에 액세스하려면 다음 사이트를 방문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