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와 흥사단의 유사점
안창호와 흥사단는 공통적으로 32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니온백과에서): 멕시코, 미국, 민족 개조론, 공립협회, 김동원 (1884년), 김성수 (1891년), 대한인국민회, 장이욱, 장택상, 이광수, 조병옥, 주요섭, 주요한, 중국, 캘리포니아주, 유길준, 유상규, 샌프란시스코, 수양동우회, 최남선, 안병욱, 하와이주, 필라델피아, 신민회, 신간회, 1913년, 1929년, 1937년, 1967년, 1월, ..., 2월, 3·1 운동. 색인을 확장하십시오 (2 더) »
멕시코
멕시코(음차: 묵서가(墨西哥)) 또는 멕시코 합중국(- 合衆國)은 아메리카에 있는 나라이.
미국
미합중국(美合衆國,, U.S.A.), 약칭 합중국(U.S.) 또는 미국(美國)은 주 50개와 특별구 1개로 이루어진 연방제 공화국이.
민족 개조론
벽에 실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민족 개조론은 이광수가 잡지 에 1922년 기고한 글이.
공립협회
공립협회(共立協會)는 구한말기,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한 애국계몽운동 단체이.
김동원 (1884년)
동원(金東元, 일본식 이름: 金岡東元 가네오카 히가시모토, 1884년 2월 1일 ~ 1951년 3월 20일)은 구한말기 애국계몽운동가, 일제강점기 교육인, 사업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
김동원 (1884년)와 안창호 · 김동원 (1884년)와 흥사단 ·
김성수 (1891년)
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근대주의 운동가였으며,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행적 논란이 있. 대한민국 초기 정치인, 언론인, 교육인, 서예가였.
김성수 (1891년)와 안창호 · 김성수 (1891년)와 흥사단 ·
대한인국민회
성문이 1909년에 고안한 대한인국민회 깃발 1915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오른쪽 열한번째는 이승만, 가운데 단상에 선 이는 안창호) 국민회(國民會, 1909. 2.)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용만, 안창호 등에 의해 창설된 미국 내 독립운동단체였.
장이욱
장이욱(張利郁, 1895년 - 1983년)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외교관, 대학총장이.
장택상
장택상(張澤相, 1893년 10월 22일 ~ 1969년 8월 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작가이.
이광수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언론인, 시인, 문학평론가, 작가, 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서 대한의 재생과 광복을 꿈꾸고 기획하였으며,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종학원에서 철학, 윤리, 심리, 종교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잡지《개벽》에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출판법위반으로 입건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22년 5월 개벽지(誌)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우리민족이 쇠퇴한 것은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로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때는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썼다.
조병옥
조병옥(趙炳玉, 1894년 5월 21일 충청남도 천안 ~ 1960년 2월 15일 미국)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이.
주요섭
주요섭(朱耀燮, 1902년 11월 24일 ~ 1972년 11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소설가, 시인, 영문학자이.
주요한
주요한(朱曜翰, 일본식 이름: 松村紘一(마쓰무라 고이치), 1900년 12월 5일 ~ 1979년 11월 17일)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사회운동가·시인·언론인, 개신교 목사이며 극작가이고, 대한민국의 정치인이.
중국
중국()은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서부 연안의 도서 지방을 포괄하는 지명이.
캘리포니아주
리포니아 주()는 미국 서부 해안선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주로, 현재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주이.
유길준
유길준(兪吉濬, 1856년 양력 11월 21일(음력 10월 24일) ~ 1914년 양력 9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작가이며 대한제국의 정치가·개화 사상가·계몽운동가이.
유상규
유상규(劉相奎, 1897~1936)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외과의사로서 대중 의료보건에 힘썼.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도시로, 북부 캘리포니아의 문화, 경제, 상업 거점 역할을 하고 있. 공식적인 명칭은 시티 앤 카운티 오브 샌프란시스코()이.
수양동우회
도산 안창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는 일제 강점기에 결성된 교육, 계몽, 사회운동 단체이.
수양동우회와 안창호 · 수양동우회와 흥사단 ·
최남선
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문학가이자 대한민국의 문화운동가이.
안병욱
안병욱(安秉煜, 1920년 6월 26일 ~ 2013년 10월 7일)은 대한민국의 철학자이.
하와이주
와이 주(모쿠아이나 오 하와이이)는 태평양의 하와이 제도에 위치하고 있. 본래는 폴리네시아 민족의 땅으로 여왕이 다스린 왕국이었으나, 사탕수수 상인과 군대를 앞세운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1959년 8월 21일 미국의 50번째 주로 편입되었.
필라델피아
아 시(City of Philadelphia)는 펜실베니아 주에서 가장 큰 도시로, 미국 북동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미국 전체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
안창호와 필라델피아 · 필라델피아와 흥사단 ·
신민회
신민회(新民會)는 상동감리교회 부설 공옥학교의 교사들과 상동감리교회 담임목사였던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조직된 민족 운동을 위한 개신교 감리교회 및 장로교회 지원을 받은 항일 비밀결사.
신간회
신간회(新幹會)는 1927년 2월 15일에 사회주의, 민족주의 세력들이 결집해서 창립한 항일단체로, 1931년 5월까지 지속한 한국의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이.
1913년
1913년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1913년와 안창호 · 1913년와 흥사단 ·
1929년
1929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1929년와 안창호 · 1929년와 흥사단 ·
1937년
1937년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1937년와 안창호 · 1937년와 흥사단 ·
1967년
1967년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1967년와 안창호 · 1967년와 흥사단 ·
1월
1월(一月)은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첫 번째 달이며, 31일까지 있는 7개의 달중 하나이.
2월
2월(二月, February)은 그레고리력에서 한 해의 두 번째 달이며, 평년일 때에는 28일, 윤년일 때에는 29일까지 있. 이 달과 그 해의 10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끝나며, 이 달과 작년의 6월은 항상 같은 요일로 시작.
3·1 운동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
위의 목록은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 안창호와 흥사단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 안창호와 흥사단의 유사점은 무엇입니까
안창호와 흥사단의 비교.
안창호에는 347 개의 관계가 있고 흥사단에는 71 개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공통점 32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Jaccard 지수는 7.66%입니다 = 32 / (347 + 71).
참고 문헌
이 기사에서는 안창호와 흥사단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정보가 추출 된 각 기사에 액세스하려면 다음 사이트를 방문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