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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씨)와 전주 이씨

바로 가기: 차이점, 유사점, Jaccard 유사성 계수, 참고 문헌.

이 (성씨)와 전주 이씨의 차이

이 (성씨) vs. 전주 이씨

외 이(李, 異, 伊)씨는 동아시아의 성씨이.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전라북도 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

이 (성씨)와 전주 이씨의 유사점

이 (성씨)와 전주 이씨는 공통적으로 23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니온백과에서): 도조, 몽골, 문성왕, 백제, 경상북도, 고려, 고려 공민왕, 평안북도, 이광수, 이의방, 전라북도, 전주시, 조선, 조선 목조, 조선 익조, 조선 태조, 조선 태종, 조선 세종, 충청남도, 신라, 원나라, 후백제, 환조.

도조

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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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몽골국(음차: 몽고(蒙古))), 약칭 몽골은 동아시아의 내륙국이다. 가장 큰 도시는 수도인 울란바토르고, 정치 체제는 의회 공화국이다. 1992년 민주주의 체제로 변경되었다. 1,564,116km2의 넓은 영토를 가진 몽골은 카자흐스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내륙국이나, 인구는 약 300만 명 으로 적다. 13세기 칭기즈 칸이 몽골 제국을 건국했으며,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몽골 제국의 제5대 칸인 쿠빌라이 칸 시절에는 국호를 원으로 개칭하고, 이후 명나라가 중원을 탈환하게 되어서 몽골 초원지대로 물러났다. 이후 1688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복속하여 외몽골로 불렸다. 1911년 제1차 혁명을 일으켰으나 1920년 철폐되었고,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영향을 받아 1921년 제2차 혁명을 일으켜 현재의 형태로 독립하였다. 북쪽으로 러시아, 남쪽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접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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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

문성왕(文聖王, ? ~ 857년, 재위:839년 ~ 857년)은 신라의 제46대 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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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백제(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 8월 29일)는 한국의 고대 국가 중 하나로,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를 구성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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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상북도(慶尙北道)는 대한민국 동남부에 있는 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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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高麗, 918년~1392년)는 918년 태봉의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이 즉위한 이후, 이성계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한반도 대부분을 지배하였던 국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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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

공민왕(恭愍王, 1330년 5월 23일 (음력 5월 6일) ~ 1374년 10월 27일 (음력 9월 22일), 재위: 1351년 ~ 1374년)은 고려의 제31대 국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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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평안북도(平安北道)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서북부에 있는 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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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언론인, 시인, 문학평론가, 작가, 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서 대한의 재생과 광복을 꿈꾸고 기획하였으며,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종학원에서 철학, 윤리, 심리, 종교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잡지《개벽》에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출판법위반으로 입건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22년 5월 개벽지(誌)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우리민족이 쇠퇴한 것은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로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때는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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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방

이의방(李義方, 1121년 ~ 1175년 1월 12일(1174년 음력 12월 18일))은 고려 중기의 무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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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전라북도(全羅北道)는 대한민국의 서남부에 있는 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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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전주시(全州市)는 대한민국 전라북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시이자 전라북도청 소재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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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선(朝鮮,, 1392년~1897년(혹은 1910년))은 이성계가 세운 나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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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목조

목조(穆祖, ? ~ 1274년)는 고려의 문신으로, 조선시대 추존왕이자 익조(翼祖)의 아버지이며,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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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익조

익조(翼祖, ?~?)는 조선의 추존왕으로, 도조(度祖)의 아버지, 환조(桓祖)의 조부, 태조(太祖)의 증조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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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조선 태조(朝鮮 太祖, 1335년 10월 27일 (음력 10월 11일) ~ 1408년 6월 18일 (음력 5월 24일), 재위: 1392년 8월 5일 (음력 7월 17일) ~ 1398년 10월 14일 (음력 9월 5일))는 고려 말의 무신 겸 정치가이자 조선의 초대 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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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종(太宗, 1367년 6월 13일 (음력 5월 16일) ~ 1422년 5월 30일 (음력 5월 10일) 재위 1400년 ~ 1418년)은 고려, 조선의 문신이자 조선의 제3대 임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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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조선 세종(朝鮮 世宗, 1397년 5월 15일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군주이며 언어학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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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충청남도(忠淸南道)는 대한민국 중서부에 있는 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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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신라(新羅, 기원전 57년 ~ 935년)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고대 한반도의 삼국 시대를 구성하였던 국가로, 세계적으로 오래 존속한 왕조들 중 하나로 꼽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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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원나라(元朝)은 13세기 몽골 제국이 세운 국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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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후백제(後百濟, 892년~936년)는 892년(신라 진성여왕 6년)에 백제의 부흥 운동을 시작으로 900년 견훤이 완산주(오늘날의 전주시)를 도읍으로 삼아 세운 나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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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조

환조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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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목록은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이 (성씨)와 전주 이씨의 비교.

이 (성씨)에는 183 개의 관계가 있고 전주 이씨에는 139 개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공통점 23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Jaccard 지수는 7.14%입니다 = 23 / (183 + 139).

참고 문헌

이 기사에서는 이 (성씨)와 전주 이씨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정보가 추출 된 각 기사에 액세스하려면 다음 사이트를 방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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