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와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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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와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의 차이
이광수 vs.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언론인, 시인, 문학평론가, 작가, 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서 대한의 재생과 광복을 꿈꾸고 기획하였으며,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종학원에서 철학, 윤리, 심리, 종교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잡지《개벽》에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출판법위반으로 입건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22년 5월 개벽지(誌)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우리민족이 쇠퇴한 것은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로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때는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썼다. 일 문학인 42인 명단은 2002년 8월 14일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제연구소, 계간 《실천문학》, 나라와 문화를 생각하는 국회의원 모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회장 김희선)이 공동 발표한 문학 분야 친일 인물 42명에 관한 명단이.
이광수와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의 유사점
이광수와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는 공통적으로 15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니온백과에서): 모윤숙, 민족문제연구소, 박태원 (1909년), 김동인, 김기진, 김용제 (시인), 일본어, 주요한, 창씨개명, 채만식, 최남선, 최재서, 서정주, 2002년, 8월 14일.
모윤숙(毛允淑, 1910년 3월 5일 ~ 1990년 6월 7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시인이며 수필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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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民族問題硏究所)는 재야운동가 임종국의 유지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설립된 단체로서, 1991년 2월 27일 '반민족문제연구소'로 시작하여 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한 민간 단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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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朴泰遠, 1909년 12월 7일 ~ 1986년 7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친일 사회주의 계파 시인, 문학평론가, 소설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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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金東仁, 일본식 이름: 東 文仁 히가시 후미히토 / 金東文仁 가네히가시 후미히토, 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문학가이자 대한민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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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基鎭, 일본식 이름: 金村八峯 가네무라 야미네, 1903년 6월 29일 ~ 1985년 5월 8일)은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이며, 시인이자 소설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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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제(金龍濟, 일본식 이름: 金村龍濟, 1909년 2월 3일 ~ 1994년 6월 21일)는 일제 강점기의 친일 공산주의 계열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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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にっぽんご」를 표제어로 세우고 있는 국어사전은 일본국어대사전 등 소수에 그친다.)는 주로 일본에서 사용되는 언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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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朱曜翰, 일본식 이름: 松村紘一(마쓰무라 고이치), 1900년 12월 5일 ~ 1979년 11월 17일)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사회운동가·시인·언론인, 개신교 목사이며 극작가이고, 대한민국의 정치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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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한글이 혼용되어 있다. 일본식 성명 강요() 또는 창씨개명()은 1940년 2월부터 1945년 8월 광복 직전까지 일본 제국이 조선인에게 일본식 성씨를 정하여 쓰도록 강요한 것을 말.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제령 제19호)하여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씨(氏)'를 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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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식(蔡萬植, 1902년 7월 21일 ~ 1950년 6월 11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 극작가, 문학평론가, 수필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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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문학가이자 대한민국의 문화운동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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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서(崔載瑞, 일본식 이름: 石田耕造 이시다 고조, 1908년 2월 11일 ~ 1964년 11월 16일)는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이며 영문학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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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徐廷柱, 1915년 5월 18일 ~ 2000년 12월 24일)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시인이며 교육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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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며, 이 해는 21세기의 첫 대규모 행사의 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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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은 그레고리력으로 226번째(윤년일 경우 227번째) 날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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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와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 이광수와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의 유사점은 무엇입니까
이광수와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의 비교.
이광수에는 627 개의 관계가 있고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는 54 개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공통점 15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Jaccard 지수는 2.20%입니다 = 15 / (627 + 5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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