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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

색인 김승학

승학(金承學, 1881년 7월 12일 ~ 1965년 12월 17일)은 한국의 교육자, 군인, 독립 운동가이.

28 처지: 방응모, 간토 대지진, 박향림,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목록, 김명준 (1870년), 김용진 (1878년), 김용환 (가수),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 김정의, 김창숙, 김탁, 김순흥, 김오성, 김성수 (1891년), 대한독립단,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각료, 대한통의부, 국민부, 장덕수, 장기초, 이 달의 독립운동가, 이광수, 이봉의, 조맹선, 차천리, 참의부, 채찬, 여운홍.

방응모

방응모(方應謨, 평안북도, 1883년 9월 29일 ~ 1950년 8월?)는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 언론인, 법조인, 기업인이자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언론인이며 정치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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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 대지진

화재가 일어난 마루노우치. 요코하마에서 본 간토 대지진의 피해 간토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 32초(일본 표준시)에 일본 가나가와현 사가미 만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큰 지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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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향림

박향림(朴響林, 1921년 ~ 1946년)은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한국의 가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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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목록

민국의 독립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중 독립장(獨立章)을 받은 독립유공자를 다룬 문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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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1870년)

명준(金明濬, 일본식 이름: 金田明, 1870년 양력 10월 26일 ~ ?)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대한제국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 교육자, 언론인, 대한민국의 언론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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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진 (1878년)

용진(金容鎭, 1878년 ~ 1968년 2월 14일)은 한국의 서화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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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 (가수)

용환(金龍渙, 1909년 ~ 1949년)은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한국의 가수 겸 작곡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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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학의 친일파 명단

승학의 친일파 명단은 1948년 김승학(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과 정치부장,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을 지냈던 인물)이 작성한 원고에 기재된 친일 인사 263명에 관한 명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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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의

정의(金正義)는 일제 강점기의 작사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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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창숙(金昌淑, 1879년 8월 27일(음력 7월 10일) ~ 1962년 5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가, 시인 겸 교육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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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

탁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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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흥

순흥(金淳興, 일본식 이름: 金本淳興, 1910년 12월 28일 ~ 1981년 10월 26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과 대한민국의 자본가이며, 일제 강점기 당시에 친일파로 지목된 바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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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성

오성(金午星,1908년 ~ 1953년?)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공산주의 이론가, 문학평론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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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1891년)

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근대주의 운동가였으며,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행적 논란이 있. 대한민국 초기 정치인, 언론인, 교육인, 서예가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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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단

독립단(大韓獨立團)은 1919년 4월 15일(음력 3월 15일) 남만주(南滿洲) 안둥 성 류허 현에서 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奎)·조병준(趙秉準) 등이 모여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로, 192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 광복군 사령부에 편입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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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각료

민국 임시정부의 각료는 1919년 4월부터 1948년 7월 22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복무하였던 각료들의 명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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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통의부

통의부(統義府)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무장독립운동단체, 군정부(軍政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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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부

국민부(國民府)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단체, 군정부(軍政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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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수

장덕수(張德秀, 1894년 12월 10일 ~ 1947년 12월 2일)는 한국의 친일파, 정치인, 교육자, 학자, 언론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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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초

장기초(張基礎, 1893년 ~ ?)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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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독립운동가

이 달의 독립운동가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선정하여 발표하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명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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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언론인, 시인, 문학평론가, 작가, 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서 대한의 재생과 광복을 꿈꾸고 기획하였으며,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종학원에서 철학, 윤리, 심리, 종교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잡지《개벽》에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출판법위반으로 입건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22년 5월 개벽지(誌)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우리민족이 쇠퇴한 것은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로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때는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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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의

이봉의(李鳳儀, 1839년 양력 3월 28일(음력 2월 14일) ~ 1919년 양력 3월 13일)는 조선말기의 무신, 관료이자 대한제국의 무신, 군인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초명은 지겸(志謙), 자는 선익(善翼), 호는 송부(松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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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선

조맹선(趙孟善, 1872~1922)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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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천리

리(車千里, 1898년 ~ 1928년)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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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부

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는 일제강점기 1924년 6월부터 1929년 10월까지 활동한 무장독립운동단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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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찬

(蔡燦, ? ~ 1924년 9월 21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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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홍

여운홍(呂運弘, 1891년 9월 1일 ~ 1973년 2월 3일)은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며 아호는 근농(勤農)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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