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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

색인 낙화암

낙화암(落花岩)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에 있는 바위이.

19 처지: 민충사, 백마강, 백제문화제, 고란사, 부여 나들목, 부여군, 부소산, 부소산성, 규암면, 규암면의 역사, 남강 (경상남도), 이광수, 의자왕, 조룡대,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01호 ~ 제200호), 어우동, 사비, 한국의 고적지, 월중도.

민충사

민충사에는 다음과 같은 동음이의어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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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

백마강(白馬江) 또는 백강(白江)은 충청남도 부여군을 지나는 금강(錦江)의 하류 구간을 부르는 이름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금산군(錦山郡) 이남의 금강 중하류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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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제

백제문화제는 매년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이 합동 개최하는 종합예술제 성격의 문화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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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사

사(皐蘭寺)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의 북쪽 백마강변에 있는 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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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나들목

부여 나들목(Buyeo IC)은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중리에 설치된 서천공주고속도로의 4번 교차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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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부여군(扶餘郡)은 대한민국 충청남도 남부에 있는 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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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

부소산(扶蘇山)은 대한민국의 부여군 부여읍 백마강 기슭에 있는 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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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

부소산성(扶蘇山城)은 백제의 마지막 왕성으로 백제시대에는 사비성(泗沘城)으로 불. 부여군 부여읍의 서쪽에 금강을 낀 부소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둘레는 대략 2.2km, 면적은 약 74만m2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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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면

암면(窺岩面)은 대한민국 충청남도 부여군에 속한 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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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면의 역사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은 백제의 고도 사비성이 접하여 있는 백마강의 건너편 지역으로 삼국시대부터 역사적인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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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경상남도)

강(南江)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남부를 흐르며, 진주시를 관통하는 낙동강의 지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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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언론인, 시인, 문학평론가, 작가, 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서 대한의 재생과 광복을 꿈꾸고 기획하였으며,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종학원에서 철학, 윤리, 심리, 종교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잡지《개벽》에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출판법위반으로 입건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22년 5월 개벽지(誌)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우리민족이 쇠퇴한 것은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로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때는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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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의자왕(義慈王, ?자식 중 하나인 부여융은 615년생이다. 이것으로 보아 595년경에 태어났을 것이다. ~ 660년, 재위: 641년 ~ 660년)은 백제의 마지막 국왕(혹은 31대 국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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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룡대

조룡대(釣龍臺)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백마강에 위치한 바위로 낙화암 근처에 위치한 바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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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01호 ~ 제200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는 문화재자료 중에서 충청남도 내에 있는 문화재자료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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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

어우동(朴於宇同, 1430년경(?) ~ 1480년 10월 18일)은 조선전기의 왕족이자 시인, 서예가, 작가, 기생, 무희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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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

사비성(泗沘城)은 백제 성왕 16년(538)에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면서 웅진에서 천도한 백제의 수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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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적지

설명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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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중도

월중도(越中圖)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있는 조선시대의 그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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