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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

색인 단종애사

종애사(端宗哀史)는 1929년 춘원 이광수가 쓴 대한민국의 역사소설이.

9 처지: 민족주의, 이광수, 전창근 (영화 감독), 조선 단종, 생육신, 사육신, 신숙주, 1920년, 1929년.

민족주의

민족주의(民族主義) 또는 혈통적 국민주의()는 민족(ethnic group)에 대해 가지는 소속감이나 애착심, 그리고 그것을 강조하려는 생각이나 정치적 운동을 말. 대표적인 예로 1992년 독립을 선포한 압하스인들의 자신들의 민족만의 나라를 건설하고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압하지야 공화국이나 근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일어난 통일 국가 수립 운동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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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이광수(李光洙),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언론인, 시인, 문학평론가, 작가, 반민족행위자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목조의 장남 안원대군의 후손이다.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민족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아시아 근대 문학과 지성의 태동기에서 대한의 재생과 광복을 꿈꾸고 기획하였으며,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언론인 활동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하였다. 종학원에서 철학, 윤리, 심리, 종교 등을 강의했고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잡지《개벽》에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출판법위반으로 입건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1922년 5월 개벽지(誌)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우리민족이 쇠퇴한 것은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같은 달 20일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 협회 주체 전선(戰線)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였다. 1940년 2월 15일자 『매일신보』에 「국민문학의 의의」를 게재하고 황민화운동을 지지하였으며, 2월 20일자 『매일신보』의 「창씨(創氏)와 나」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바꾼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녹기(綠旗)』에 「진정 마음이 만나서야말로」를 연재하였으며, 9월 직접 작사한 노래 「지원병 장행가(壯行歌)」가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방송되었다. 12월에는 『국민총력』에 지원병훈련소 참관기인 「지원병훈련소의 하루」를 발표하였고, 황도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1년 일본어 산문집 『동포에 부침』이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간행되었다. 8월 임전대책협의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41년 9월 3∼5일자 『매일신보』에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해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였다.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전시생활부장으로, 영미타도대강연회에서 ‘사상 함께 영미를 격멸하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는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신시대』 1942년 4월호 「징병과 여성」을 게재해 징병제 실시를 환영하는 입장을 보였다. 6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일본 군인이 되는 마음가짐’을 듣는 좌담회,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하였다.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고,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경성익찬회 종로위원회 실행위원과 연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달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하였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다. 8월 적국항복 문인대강연회에서 ‘전쟁과 문학’이란 제목으로 강연을하였으며, 11월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45년 2월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6월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과 대의당(大義黨) 위원이 되었다. 해방 이후로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때는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자는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고주(孤舟)·외배·올보리·장백산인(長白山人)이며, 필명으로 춘원생, 경서학인(京西學人), 노아자닷뫼당백, Y생, 장백, 장백산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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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근 (영화 감독)

전창근(全昌根, 1908년 1월 18일 ~ 1973년 1월 19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연극인이며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겸 영화배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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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단종

종(端宗, 1441년 8월 9일 (음력 7월 23일) ~ 1457년 11월 7일 (음력 10월 21일), 재위 1452년~1455년)은 조선의 제6대 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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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

생육신(生六臣)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명의 신하를 말. 세조의 찬위 사건을 불의의 행위로 단정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원칙에 따라 두문(杜門) 혹은 방랑으로 일생을 보. 이들은 벼슬을 버리고 단종을 추모하면서 절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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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량진공원 의절사 사육신(死六臣)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신하를 이르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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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신숙주(申叔舟, 1417년 8월 2일 (음력 6월 20일) ~ 1475년 7월 23일 (음력 6월 21일))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문신·정치가이며 언어학자, 외교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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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920년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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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929년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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